생활의 달인 1012회 은둔식달 혜화역 칼국수 양지 수육 달인 맛집 식당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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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둔식달 - 칼국수·양지 수육 달인
서울 혜화역을 지나 골목 안으로 몇 걸음만 들어서면, 도시의 소음이 서서히 옅어지고 대신 오래된 간판의 빛바랜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도심 속이지만 마치 시간의 결을 거스르는 듯한 조용한 거리. 그 끝에는 허름한 외관 속에서도 단단한 존재감을 내뿜는 한 끼의 성전이 있다. 바로 ‘ㅁ’ 수육칼국수집.
이곳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는 게 아니다. 오전을 꼬박 준비에만 쏟고, 문은 점심 직전, 오전 11시에 열린다. 단 두 시간. 딱 그뿐이다. 그리고 재료가 떨어지면, 아직 줄이 남았더라도 미련 없이 문을 닫는다. 처음 방문한 사람은 “장사 의지가 없는 거 아닌가?” 싶지만, 단골들은 안다. 그건 ‘장사의 규칙’이 아니라 ‘맛의 약속’이라는 걸.
고기 한 점의 철학
가게 안은 그리 크지 않다. 테이블이 다섯 개 남짓, 오래된 가스렌지와 색이 바랜 국솥이 주방 한편에 자리한다. 냄새가 먼저 반긴다. 기름 냄새나 고기 냄새가 아니다. 진득한 육향 사이로 스치는 대파의 단내, 몇 시간을 우려낸 양지국물이 퍼지는 향기. 그것만으로도 이곳의 세월이 느껴진다.
달인의 양지 수육은 ‘오래 삶았다’는 평범한 말로는 부족하다. 젓가락으로 들어 올리는 순간, 결이 스르르 풀려버린다. 힘을 주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찢어지며, 그 속살이 부드럽게 반짝인다. 입에 넣는 순간은 더 기겁스럽다. 이건 씹는 게 아니다. ‘사라진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혀 위에서 고기가 녹으면서 남기는 지방의 단맛, 그리고 그 여운을 따뜻한 국물 한 모금이 살살 감싼다.
주인장은 말수가 적다. 대신 손의 움직임은 분주하다. 고기의 결 한 줄기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그는 “수육은 불의 시간 싸움”이라 말한다. 끓어오르는 온도와 그 순간의 미세한 거품까지 확인하며 시간을 조절한다. 이 집에서는 ‘삶는다’가 아니라 ‘만든다’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양지는 조급하게 하면 안 돼요. 불이 너무 세면 섬유가 조여서 질겨지고, 너무 약하면 그 특유의 고소한 맛이 빠져요. 시간도 중요하지만, 불의 리듬이 더 중요하죠.”
그가 들려주는 말은 단순한 조리법이 아니라 장인의 언어다.
국물의 온도, 삶의 온도
수육만큼이나 이 집의 또 다른 주인공은 칼국수다. 겉보기엔 평범한 국수지만, 한입 떠넣는 순간 그 깊이가 다르다. 투박한 손칼국수 면은 적당히 굵고, 그 질감이 입안에서 쫄깃하게 살아난다. 국물은 탁하지 않다. 맑고 진하다. 양지로 낸 육수의 감칠맛이 면에 완벽히 배어들어, 마치 고기와 대화를 나누는 듯 조화롭다.
국물엔 간이 세지 않다. 간을 세게 하지 않아도 입안에서 풍미가 충만해지는 건, 재료가 온전히 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장시간 우러나온 사골과 양지에서 베어든 감칠맛이 중심을 잡고, 그 위에 파와 마늘, 소금이 살짝 터치해 준다.
식사 중간, 주인장은 늘 말없이 물 한 주전자와 함께 작은 간장소스를 내온다. 우리는 그저 수육 한 점을 소스에 살짝 찍어 먹는다. 짭조름하면서 단맛이 감도는 그 간장소스는 수육의 부드러움에 날개를 단다. 입안이 포근해지고, 고소함이 한층 살아난다.
단골이 만드는 풍경
식당 안엔 말이 적다. 모두 음식에 집중한다. 젓가락이 닿는 소리, 국물이 뜨거워 살짝 불어먹는 숨결, 그리고 “허, 이게 이 맛이지”라는 탄성이 공간을 채운다. 단골들은 대체로 혼자 온다. 지인과 함께 와도 말이 길지 않다. 이곳의 음식은 대화보다 더 많은 위로를 준다.
한 손님은 “이곳 수육은 먹을 때마다 마음이 편해져요. ‘오늘 하루도 잘 살았다’는 생각이 들어요.”라며 웃는다. 그 말이 절묘하게 이 집의 정체성을 설명한다. 호화로운 장식도, 특별한 서비스도 없다. 대신 묵직한 정성과 진심이 있다.
그 진심은 국물 속에서도, 고기의 결 속에서도 분명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 진심은 매일 이른 새벽부터 솥 앞을 지키는 주인장의 시간에서 비롯된다. 그는 새벽 5시에 불을 켜고, 육수를 맑게 우리는 동안 다른 재료들을 손질한다. 그 반복되는 일상을 스무 해 넘게 이어온 사람이다.
오래된 맛이 주는 위로
요즘 같은 시대에는 이런 집이 점점 드물다. 화려한 인테리어와 SNS용 플레이팅으로 무장한 음식점이 넘쳐나지만, 정작 ‘오래된 맛’의 무게를 아는 곳은 손에 꼽힌다. 혜화동의 이 노포는 그러한 갈증을 달래준다.
먹는 순간엔 단순히 ‘맛있다’보다 ‘따뜻하다’는 감정이 든다. 아마 그건 음식이 아니라, 그 뒤에 숨겨진 정성과 시간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오랜 세월 한결같은 방식으로 한 솥의 국물과 한 점의 고기를 지켜온 주인장의 손끝에는, 음식 이상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그건 바로 ‘묵묵함의 미학’.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도 자신만의 속도로 삶을 끓여내는 것. 그래서 이 집을 찾아 나선 사람들은 단순히 허기를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묵직한 시간의 흐름을 맛보기 위해 오는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 골목을 벗어나 세상 속으로 다시 돌아가는 순간에도 입안에는 아직 그 따뜻한 국물의 여운이 남는다. 온몸이 나른하게 풀리며, 왠지 모르게 기분이 차분해진다.
“아, 나 오늘도 잘 살았다.”
그 말 한마디가 머릿속에 울린다. 그것이 바로 ‘은둔식달’의 진짜 힘이다.